작년에 할머니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진 일이 있었다. 정말 운이 좋게도 그 당시에 도우미분께서 할머니댁에 방문하신 상태라 할머니는 빠르게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상황은 기적같다.
그렇게 할머니는 골든타임내에 입원하셨지만 희망을 잃으신 듯 했다. 이전에 할아버지께서도 낙상사고로 입원을 하신후에 퇴원을하지 못하셨고, 주위 어른들도 입원하신 후에 건강하게 퇴원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선례들은 퇴원할수 있으리라는 할머니의 기대를 꺾기에 충분했다. 매번 전화를 드릴때마다 할머니께서는 "몸이 잘 안움직인다.", "퇴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같은말을 연신 내뱉으시며 깊은 한숨을 내뱉으셨다.
당시 할머니에게는 노세보 효과가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노세보(Nocevo)는 라틴어로 '해를 끼치다'라는 의미이다. 노세보 효과는 어떤 약이나 치료에 대한 부정적인 예상 때문에 치료 효과가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나타낸다. 환자가 흔히 내뱉는 부정적인 말들은 충분히 노세보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허리가 계속 나빠진다.', '머리가 깨질것 같다.', '더 좋아질수 있을지 모르겠다.' 와 같은 부정적인 말들은 실제로 불안감을 높이고, 통증에 영향을 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시키고, 뇌의 통증 네트워크를 자극한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몸에 이상이나 위험을 느낄때 더 영향을 많이 받는다. 당시 할머니의 부정적인 생각과 예상들도 할머니를 더 아프게하고, 치료 효과가 부정적으로 작용했을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할머니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꿔드리고자 노력했다. 뇌경색은 발병했을때 얼마나 빨리 혈관을 다시 뚫어주느냐가 뇌기능의 보존과 회복을 결정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발병 즉시 입원하여 막힌 혈관을 빠르게 뚫을수 있었다. 할머니는 이런 긍정적인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셨고, 나는 이부분을 강조하여 전달드렸다.
"지금 병원에 엄청 빨리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거라 상황이 너무 좋다. 잘 먹고 잘 지내시다보면 움직이지 않으시는 손도 곧 움직이실거다. 운이 좋아 너무 기쁘다. 빨리 퇴원해서 맛있는거 같이 먹으러갔으면 좋겠다."
할머니께서는 반신반의(?)하며 내 말을 들어주셨고, 퇴원할수 있다는 기대감을 조금씩 가지셨다. 이후 재활치료도 잘 받아서 지금은 건강하게 퇴원하셨다. 물론 나의 단순한 이 말이 치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진 않았겠지만, 나는 할머니에게 기대감과 희망을 드릴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기대감과 희망은 때로는 강력하게 작용한다.
기대감과 희망은 뇌를 변화시킨다. 토르 웨거박사의 연구팀은 플라세보 치료가 통증과 관련된 뇌 전 영역에 걸쳐 오피오이드 분비를 증가시키는것을 발견했다. 통증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감만으로도 뇌에 저장된 엔드로핀같은 오피오이드가 분비되기 충분했던 것이다 (오피오이드는 몸에서 분비되는 천연 진통제이다). 기대감을 심어주는것은 단순히 환자에게 병이 나았다고 속이는 것이아니라, 실제로 천연 진통제를 분비시키며 진짜 약이 작용하는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연구결과도 있다. 이 연구에서는 똑같이 진통제를 맞고있는 환자라도 자신이 진통제를 맞고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환자와 그렇지 못한 환자의차이가 존재함을 발견했다. 진통제를 맞고있어도 그 사실을 모르는 환자는 효과가 미미했지만, 진통제가 투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자 진통 효과가 2배로 증가했다. 그리고 실제로 진통제가 계속 투여되고있어도, 투여가 중단되었다고 알리면 환자들은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대감이라는 요인만으로 진통제의 효과가 달라지는 현상은 놀랍다. 몸에 투여되는 활성물질은 동일함에도 말이다.
이처럼 치료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은 실제로 우리의 통증을 줄여주며 치료 효과를 높여준다. 병을 치료하는 의학적 기술뿐만아니라, 이런 심리적 사회적 요인도 통증에 깊게 개입할수 있는 사실은 놀랍다. 할머니의 치료에 대한 희망은 분명히 다시 일어날수 있었던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할머니를 뵈러갈때마다 (사실에 기반한) 작은 희망들을 많이 전달드려야겠다. 그런 작은 희망과 기대감 위에서 할머니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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